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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백수일기

놀아야 한다

쟈니김 2016.06.16 13:07

지금은 기억도 까마득한 학부 시절, 한동안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학문을 탐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끈기와 진리 탐구를 향한 무열정을 자각한 탓에 긴 고민 없이 단념할 수 있었다. 당시 잠시나마 고민했던 배경에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상당히 컸었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에는 매년 새로운 여학생들과 즐거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바로 ‘안식년’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일 년간 강의와 연구활동을 벗어나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점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안식년 좀 누려보겠다고 교수가 되는 과정을 감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입사 후 한동안은 취업에 성공했다는 기쁨과 커다란 성취감에 한동안은 잘 지냈다. 그러나 더는 방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스트레스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또한, 지인 중 상당수가 광고계에 있어 근속연수에 따라 한 달 정도의 ‘리프레쉬’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한동안 박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크리에이티브는 광고회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닌데, 국내 전체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말할 필요가 없는 회사였기에 직장생활은 원만했으나, 중장기 휴식 마일스톤이 없었다. 나는 10년이 지나도록 긴 휴식이 고팠다.


그렇다. 놀아야 한다. 이왕이면 길게.


회사에 제도가 생겼다. 이름은 ‘자기 계발 휴직’. 1년 무급. 직원들 사이에서도 꼭 한 번 써야겠다는 기대와 자연스럽게 퇴직을 유도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로 반응이 갈렸다. 나는 당연히 기대하는 쪽이었다. 실질 소득 감소와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제도 도입 시점부터 나름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대략적인 시기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사항들을 염두에 두며 생활했다. 동료들에게 계획을 밝힐 수는 없었으나 목표를 설정하니 업무능률과 의욕이 높아졌다. (물론 이 대목은 동료들이 읽는다면 다소 논쟁이 있을 듯하다.) 원대한 꿈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끈다지만, 계획된 휴식은 사람을 현재에 충실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휴직을 선언했다. 주변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그렇게 회사생활이 힘들었냐는 동정, 결국 못 버티고 도망가는 것이냐는 속단, 이런 시국에 쉬고 와서 괜찮겠냐는 현실적 걱정,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진심 어린 응원, 꼭 뒤를 따라 지르겠다는 결심을 만들어낸 진한 부러움. 반응은 여러 가지였으나 공통적으로는 본인도 쉬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길게 쉴 수 없는 팍팍한 현실의 벽을 넘는 결단과 밥벌이의 지루한 반복을 멈추는 불안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쩌면 조금 무책임하고 살짝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2016.05.03 긴 여행의 첫 날 @Chuo-ku, Sapporo


한국은 무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 나는 비록 교수는 되지 못했지만, 초가을 날씨의 삿포로에서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이 글을 쓰며 성실하게 놀고 있다. 쉬니까 참 좋다. 노니까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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