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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유감

쟈니김 2017.02.24 16:26

돌이켜 보니 그때부터다. 눈빛 주고받을 겨를도 없이 그 녀석은 별안간 뛰어들었다. 세계적 멸종위기종을 직접 본 행운보다는, 수많은 차가 오가던 왕복 8차선 고속도로에서 만난 불행이 더 컸다. 게다가 나는 규정 속도를 준수하고 있었다. 한밤 고속도로에서 그 녀석을 애도할 방법 또한 없었다. 해가 바뀐 지 며칠 안 된 날, 흉측하게 부서진 범퍼가 불길했다. 그때부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멋짐주의 (출처:blog.naver.com/nomadtour)

 

홋카이도에는 사람보다 사슴이 많다. 야생 너구리와 여우도 많다. 그래서 친구는 꽤 여러 번 운전 요령을 강조했다. 차 앞에 야생동물이 뛰어들어와도 절대 핸들을 꺾으면 안 된다고. 진행방향 그대로 밀고 가야 내가 다치지 않는다고 말이다. 여러 번 마음에 새겼던 이미지 트레이닝 덕분일까. 나로서는 그나마 큰 화를 면했다. 다른 차와의 충돌이나 전복의 2차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별안간 생을 마감한 어린 고라니는 억울했나 보다. 그 녀석 탓이라도 해야 작은 위로가 될 정도로 내 온갖 일이 다 꼬였다. 덕분에 은퇴 후 일상을 미리 체험하며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맛집에 가서 즐거운 식사를 하다가도 문득 ‘내가 여기서 왜 이걸 먹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 아아 삿포로 눈축제와 동계아시안게임 직관을 못할 줄이야!

 

하지만 로드킬 때문에 나처럼 작은 불행을 맞을지언정, 핸들은 꺾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고라니에겐 여전히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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